바보가 영웅이 될 수 있을까요? 보통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웃어넘기겠지만, 포레스트 검프를 보고 난 뒤에는 이 질문이 달리 들립니다. 저는 이 영화를 슬럼프가 올 때마다 꺼내 봅니다. 그리고 볼 때마다 부끄러워집니다. 이것저것 재다가 결국 시도조차 못 했던 수많은 결정들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가르침이 만든 사람
1994년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척추측만증(Scoliosis)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인간의 인지 능력을 수치화한 지표인 지능지수(IQ)가 75에 불과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기준으로 포레스트는 일반 학교 입학조차 거부당할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넌 다르지 않다"고 가르쳤습니다. 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다름 때문에 위축되거나 좌절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포레스트에게 반복해서 가르친 메시지는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넌 다르지 않다는 것, 바보짓을 하는 게 진짜 바보라는 것, 그리고 인생은 초콜릿 상자처럼 무엇이 나올지 모르니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반복해서 들었던 이 가르침들은 포레스트의 삶 전체를 단단히 지탱해 주었습니다. 만약 이 가르침들이 없었다면 그는 평범한 비극의 주인공으로 남았을지 모릅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세상의 편견에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한 마음을 심어주었습니다. 훗날 전쟁과 상실, 수많은 시련을 견뎌낼 수 있었던 힘도 어쩌면 그때부터 만들어졌는지 모릅니다.
포레스트가 자신의 아이를 처음 봤을 때 눈물을 글썽이며 "혹시 나를 닮았냐"고 걱정하던 장면이 있습니다. 백만장자가 되고 전쟁 영웅이 되어서도, 그는 여전히 그 상처를 안고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 한 장면이 이 영화에서 제게 가장 오래 남아 있는 이유입니다.
네 명의 바보, 각자의 초콜릿
영화에는 사실상 네 명의 주요 인물이 등장합니다. 제니만 찾는 포레스트, 자유만 찾는 제니, 명예만 찾는 댄 중위, 새우만 찾는 버버. 저는 이 영화를 나이를 먹으면서 다시 볼수록, 제니가 운명에 휩쓸려 다니는 인간의 전형을 상징하고 포레스트는 불평 없이 운명을 살아내는 인간의 전형을 상징한다는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제니는 나쁜 여자인가, 하는 질문은 이 영화의 오래된 논쟁 중 하나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제니가 나쁜 여자가 맞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그녀의 본심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해 이후의 행동 패턴과 대인 관계에 지속적으로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 심각한 심리적 상처인 트라우마(Trauma)를 안고 있었습니다. 제니가 스트립 클럽에서 노래하고, 히피가 되고, 폭력적인 남자 곁을 떠나지 못했던 것 모두, 도망치려 했지만 결국 도망치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댄 중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군인으로서의 명예로운 전사(戰死)라는 목표를 가지고 참전했지만, 다리를 잃고 살아 돌아오면서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됩니다. 여기에는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일관된 감각을 의미하는 자아정체성(Self-identity)의 붕괴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댄 중위에게는 '군인'이라는 정체성 외에 스스로를 지탱할 다른 기둥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포레스트가 말로 설득한 것이 아니라, 그냥 옆에 있어 주고 함께 폭풍우를 버텨냄으로써 댄 중위를 두 번 살린 장면은 제 경험상 이 영화의 가장 조용하고 강력한 장면입니다.
실제로 어린 시절 학대 경험은 성인이 된 이후의 자기파괴적 행동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꾸준히 보고되고 있습니다. 제니의 삶이 그냥 허구의 극단적 설정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버버는 좀 다릅니다. 새우잡이 선장이라는 구체적이고 단순한 꿈을 가졌지만, 베트남 강가에서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죽었습니다. 그 꿈을 대신 이루어 준 것이 포레스트였다는 점이 이 영화에서 가장 담담하게 슬픈 부분 중 하나입니다.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
이 영화가 말하는 인생의 핵심은 결국 길흉화복을 도저히 예측할 수 없다는 의미를 담은 새옹지마(塞翁之馬)의 순리 구도와 닿아 있습니다. 실제로 극 중 네 명의 인물 중 그 누구도 처음에 자신이 원했던 결과물을 그대로 손에 쥐지 못했습니다. 댄 중위는 새우잡이 사업으로 성공했고, 제니는 유명 가수가 되지 못했으며, 버버는 선장이 되기 전에 죽었고, 포레스트는 제니 곁에 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포레스트만이 그 과정을 불평 없이 통과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가 감동적인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자신에게 찾아오는 모든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댄 중위처럼 분노하거나 제니처럼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쟁터에서도 "항상 어딘가 갈 곳이 있어서 좋았다"고 했는데, 이 대사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어이없다고 웃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이 말이 부럽게 느껴집니다.
"런, 포레스트 런(Run, Forrest, Run!)"이라는 대사가 나오는 장면들이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장면이 나올 때마다 포레스트는 성장해 있고, 보는 사람은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같이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그게 명장면의 조건이 아닐까요. 기억하기 쉽고, 기억에 강렬하게 남고, 보는 사람을 감정적으로 끌어당기는 것.
포레스트는 자신의 굴곡진 인생을 버스 정류장의 낯선 이들에게 담담하게 풀어놓습니다.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이야기 형태로 의미화함으로써 자아를 형성해 간다는 학설을 내러티브 심리학(Narrative Psychology)이라고 부릅니다. 포레스트의 그 담담한 고백이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실제로 심리학 연구에서는 힘들었던 경험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 회복과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나도 그냥 덤덤하게 인생을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처음 든 것이 아닙니다. 볼 때마다 그 생각이 갱신됩니다. 그러면서도 현실로 돌아오면 또 이것저것 재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되죠.
정리하면, 포레스트 검프는 어떤 특별한 능력 덕분에 영웅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냥 달렸고, 그냥 했고, 그냥 사랑했습니다. 잔머리를 굴려 봤자 결국 순수한 원칙을 지킨 바보가 인생의 승자였다는 이 영화의 결론이 허황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돌고 돌아 맞는 말입니다. 슬럼프가 올 때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보시길 권합니다. 제니처럼 도망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든, 댄 중위처럼 분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든, 그 발견 자체가 이미 출발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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