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석 노트
영화 한 편에 담긴 창작자의 의도와 캐릭터의 내면세계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공간

트로이, 신이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

신화 속 영웅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영화 트로이(2004)는 그 질문에서 시작하는 작품입니다. 의외였던 건 신화 영화인데도 신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볼 때 조금 낯설었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신보다 인간이 더 눈에 들어왔던 영화

원작인 일리아스를 보면 신들이 끊임없이 전쟁에 개입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 부분을 거의 덜어냈습니다. 누군가는 신에게 기도하지만, 결국 선택도 결과도 인간이 감당합니다. 그래서인지 인물들이 훨씬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아킬레스도 무적의 영웅이라기보다 재능이 압도적인 전사에 가깝습니다. 싸우는 장면은 여전히 멋있지만, 신화 속 존재라기보다 실제 전장에 있었을 법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특히 아킬레스가 전쟁에 참여하는 이유도 단순합니다. 그는 영광을 원합니다. 오래 살고 싶은 사람이라기보다, 이름을 남기고 싶은 사람에 가깝습니다. 영화 내내 그 생각은 거의 변하지 않습니다. 반면 헥토르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과 나라를 지키려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다른 두 인물의 대립을 중심으로 영화가 전개됩니다.

트로이에서 가장 안타까운 건

영화를 다시 보면서 느낀 건, 트로이에서 가장 고생한 사람은 헥토르라는 점이었습니다. 동생 파리스는 사고를 치고,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은 그걸 막지 못합니다. 나라 전체가 전쟁에 휘말렸는데도 결국 수습은 헥토르의 몫입니다.

그는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전쟁의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아내와 아이가 있고, 자신이 죽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압니다. 그래서 아킬레스와 결투를 앞두고 가족을 바라보는 장면은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미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사람의 표정처럼 보였거든요.

처음에는 당연히 무적의 아킬레스가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다시 보니 헥토르 쪽에 더 감정이 갔습니다. 책임져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의 무게가 훨씬 크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헥토르가 죽은 뒤부터는 영화 분위기 자체가 달라집니다. 트로이가 무너지는 과정도 결국 헥토르라는 기둥 하나가 사라진 뒤의 이야기처럼 보였습니다.

아킬레스가 변하는 과정

아킬레스는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입니다. 왕도 무시하고, 명령도 따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브리세이스를 만나고, 페트로클루스의 죽음을 겪으면서 조금씩 달라집니다. 물론 끝까지 거친 성격은 그대로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도 전투 장면이 아닙니다. 프리아모스 왕이 몰래 적진으로 찾아와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입니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전사가 마주 앉아 있는 그 장면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강렬한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전까지의 아킬레스는 분노에 휩싸여 있었지만, 그 장면 이후 처음으로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도 조금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최고의 전사로 기억되는 인물이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한 사람으로 죽어갑니다.

결국 사람 이야기

요즘 영화들은 CG가 훨씬 화려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트로이는 지금 다시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습니다. 수천 명이 부딪히는 화려한 전쟁 장면도 보기 좋지만, 결국 기억에 남는 건 사람들 아닐까요. 영광을 좇는 아킬레스, 책임을 짊어진 헥토르, 그리고 끝까지 아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프리아모스 왕. 그래서 이 영화는 신화 기반 영화이지만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입니다.

2000년대 전쟁 영화들, 반지의 제왕, 킹덤 오브 헤븐, 그리고 트로이를 보면 지금의 대작들보다 오히려 더 현실적이란 생각이 자꾸 듭니다. TV에서 나오면 무조건 손을 멈추게 되는 영화가 몇 편이나 있을까요. 트로이는 그중 하나입니다. 신화를 믿지 않아도, 역사에 관심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냥 사람들 사는 이야기를 보고 싶다면 추천하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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