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았는데 — 《인사이드 아웃》
어릴 때 처음 《인사이드 아웃》을 봤을 때는 솔직히 슬픔이가 답답했습니다. 기쁨이가 라일리를 다시 웃게 만들려고 애쓰는데 자꾸 기억 구슬에 손을 대고 일을 꼬이게 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 눈에는 기쁨이는 도움이 되는 감정이고, 슬픔이는 가능한 한 빨리 치워야 하는 감정이었습니다.
몇 년 뒤 다시 봤을 때 그 판단을 가장 먼저 흔든 것은 라일리도, 마지막의 기억 구슬도 아니었습니다. 빙봉이 자신의 로켓을 잃고 주저앉아 있는 짧은 장면이었습니다.
기쁨이는 웃게 했고, 슬픔이는 울게 두었다
빙봉이 낙담하자 기쁨이는 어떻게든 기분을 바꿔주려고 합니다. 우스운 행동을 하고 좋은 생각을 하게 만들면서 다시 일어나게 하려 하지요. 평소라면 저도 그게 위로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힘들어하는 사람을 빨리 괜찮게 만들어 주는 것이 좋은 반응이라고 여겼으니까요.
그런데 빙봉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슬픔이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합니다. 특별한 해결책을 내놓지도 않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라고 설득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옆에 앉아 빙봉이 잃어버린 것에 대해 묻고 이야기를 듣습니다. 빙봉은 자기 로켓과 라일리와의 기억을 이야기하다 한참 울고 난 뒤에야 다시 일어섭니다.
이상했습니다. 빙봉을 다시 움직이게 한 것은 가장 긍정적인 기쁨이가 아니라,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은 슬픔이였습니다.
처음에는 이 장면을 단순히 “슬플 때는 울어도 된다”는 정도로 봤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조금 달랐습니다. 슬픔이가 한 일은 빙봉의 기분을 나쁜 상태에서 좋은 상태로 바꾸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혼자 가지고 있던 상실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게 만든 것에 가까웠습니다.
라일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이 장면을 알고 나면 라일리의 이야기도 다르게 보입니다. 이사 후 라일리는 익숙한 집과 친구, 하키팀을 한꺼번에 잃습니다. 새 학교에서는 어색하고 부모님 역시 새로운 생활 때문에 지쳐 있습니다. 그런데 라일리는 계속 괜찮은 아이로 남으려 합니다.
기쁨이 역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라일리를 다시 웃게 만들고 예전처럼 밝게 돌아오게 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슬픔은 가능한 한 제어해야 하고, 슬픈 기억도 기쁜 기억으로 되돌려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라일리는 나아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정 자체와 점점 멀어지고, 결국 집을 떠나려 합니다.
마지막에 라일리가 부모님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은 빙봉의 장면과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라일리는 미네소타가 그립고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처음으로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부모님도 자신들 역시 그곳이 그립다고 털어놓고 라일리를 안아줍니다.
빙봉에게 일어났던 일이 라일리에게도 반복됩니다. 둘 다 슬픔을 없앤 뒤 다시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슬퍼할 수 있게 된 뒤에야 다른 사람과 다시 연결됩니다.
이 장면을 다시 봤을 때 어릴 적 제가 왜 슬픔이를 그렇게 싫어했는지도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저 역시 슬픈 마음은 빨리 치워야 하고, 힘들어도 괜찮은 척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기쁨이가 슬픔이를 작은 원 안에 세워두고 나오지 못하게 했던 것처럼, 저도 제 안의 슬픔을 자꾸 한쪽으로 밀어냈습니다.
마음이 복잡한 시기에 이 영화를 다시 봤을 때 그 장면이 이상할 만큼 오래 머물렀던 것도 그래서였을 겁니다. 처음에는 슬픔이가 라일리를 방해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라일리가 자신이 힘들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만드는 감정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빙봉에게는 또 하나의 기억이 있습니다.
영화관에서 빙봉이 사라지는 장면을 처음 봤을 때 화면보다 먼저 주변 관객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이들은 조용히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아이를 데리고 온 어른들은 여기저기서 눈물을 닦고 있었습니다.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많이 울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기억에 남았습니다.
저도 어릴 때 상상 속 친구가 있었습니다. 늘 곁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떠올리지 않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느 날 작별 인사를 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조금씩 잊었습니다.
그래서 빙봉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 한 캐릭터의 희생만 떠오르지 않습니다. 한때는 너무 중요했지만 언제 놓고 왔는지도 모르는 어린 시절의 무언가가 함께 생각납니다. 성장하면서 새로운 것을 얻는 동안 소리 없이 사라지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어른들이 먼저 알아본 것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하지만 빙봉의 이별이 영화의 마지막 답은 아닙니다. 영화는 상실을 보여준 뒤 다시 라일리의 기억으로 돌아갑니다.
마지막 기억에는 왜 두 가지 색이 섞였을까
영화 초반의 기억 구슬은 감정에 따라 한 가지 색으로 나뉩니다. 저 역시 영화를 처음 볼 때 감정을 비슷하게 나눴습니다. 기쁘면 좋은 일이고, 슬프면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에는 그 구분이 무너집니다. 하나의 기억 안에 기쁨과 슬픔이 함께 들어갑니다.
지나고 보면 실제 기억도 그렇습니다. 행복했던 시간인데 떠올리면 아쉬울 수 있고, 힘들었던 경험인데 시간이 흐른 뒤에는 고마운 사람이 함께 생각나기도 합니다. 새로운 출발이 기대되면서 동시에 떠나온 곳이 그리울 수도 있습니다.
라일리 역시 슬픔을 느꼈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실을 드러냈기 때문에 부모님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슬픔은 라일리를 무너뜨린 감정이라기보다, 혼자 버티던 라일리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상태를 알릴 수 있게 한 감정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지금 다시 보면 슬픔이가 기억 구슬에 손을 대는 모습도 예전과 같게 보이지 않습니다. 어릴 때는 기쁨이가 해야 할 일을 방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는 라일리에게 이미 생겨난 슬픔을 혼자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보여주는 존재처럼 느껴집니다.
기쁨이가 라일리를 웃게 하는 감정이라면, 슬픔이는 때때로 누군가에게 “나 지금 힘들어”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감정이었습니다.
어릴 때는 보이지 않았던 슬픔이의 자리가 제게는 이제 그곳에 있습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