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함으로 보였던 고독, 《그린북》을 세 번 보고 달라진 판단
인종차별을 다룬 영화라면 무겁고 불편할 거라고 지레짐작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린북》을 처음 보고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KFC에 가서 치킨을 뜯는 것이었습니다. 친구와 영화관에서 본 첫 관람에서는 치킨 장면이 유쾌했고, 마지막에는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일부러 혼자 본 두 번째에도 같은 결말에서 울었지만, 울게 된 이유는 조금 달랐습니다.
세 번째가 되자 처음에는 오만하다고 여겼던 셜리를 전과 같은 사람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영화 속 사건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달라진 쪽은 제 판단이었지요. 치킨을 거절하는 태도, 혼자 술을 마시는 밤, 흑인 클럽의 피아노 앞에 앉는 순간, 크리스마스 식탁으로 들어가는 선택이 이어지자 그의 거리감은 오만함보다 고독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멀리서 보았던 셜리와 가까이서 보게 된 셜리
첫 관람의 셜리는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말과 몸가짐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토니가 권하는 치킨도 처음에는 거절합니다. 반대로 토니는 입이 거칠고 행동이 즉흥적입니다. 두 사람을 나란히 놓으면 토니의 날것 같은 활기와 셜리의 단정한 거리감이 먼저 대비됩니다. 그래서 저는 셜리가 스스로 벽을 세우는 사람이라고 빠르게 판단했습니다.
차 안에서 치킨을 주고받는 대목도 그 대비를 이용한 유머로만 봤습니다. 셜리가 마침내 치킨을 손에 들고 토니를 따라 뼈를 차창 밖으로 던질 때 웃음이 터졌습니다. 영화를 본 뒤 KFC로 향한 것도 그 감각이 오래 남았기 때문일 겁니다. 까다로운 사람이 조금 풀리고, 거친 사람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간 장면처럼 보였습니다.
다시 보니 셜리가 왜 처음에 치킨을 거절했는지도 생각하게 됐습니다. 단순히 입맛이나 품위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늘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온 태도의 일부였을 수도 있습니다. 영화는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의 저는 그런 망설임보다 토니와 주고받는 농담의 속도를 먼저 따라갔습니다.
혼자 다시 보니 치킨보다 먼저 떠오른 것은 셜리가 술을 마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장면에서도 오만한 엘리트의 자기연민을 보았습니다. 뛰어난 연주 실력을 지녔고 스스로 타인과 선을 긋는 사람이니, 외로움도 어느 정도는 그가 선택한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저는 그의 침묵을 성격으로 너무 빨리 번역했습니다.
여행에서 셜리는 백인 관객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지만, 그들이 쓰는 공간을 똑같이 이용하지 못하는 순간들을 겪습니다. 무대에서는 환영받고 무대 밖에서는 밀려나는 간격이 반복됩니다. 그렇다고 흑인 공동체 안에서 곧바로 편안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확정하기보다, 어느 자리에서도 자신의 전체 모습을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혼술은 남을 내려다보는 자세가 아니라 하루 동안 무너지지 않으려고 붙든 자세처럼 보였습니다. 토니는 불편하면 말하고, 먹고, 몸을 움직입니다. 셜리는 감정을 밖으로 쏟는 대신 정돈된 표정 안에 넣어 둡니다. 두 번째 관람에서는 그 차이가 단순한 성격의 대비를 넘어 각자가 살아남기 위해 익힌 습관의 차이로 다가왔습니다.
오만함이라고 생각했던 셜리의 거리는, 가까이에서 볼수록 조금씩 다른 얼굴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세 번째에는 치킨을 먹는 변화도 다르게 읽혔습니다. 이를 ‘진짜 자신을 찾은 순간’이라고 단정하면 또 하나의 틀에 셜리를 가두게 됩니다. 치킨을 먹어야 자연스러운 사람도 아니고, 먹지 않아야 품위를 지키는 사람도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음식 자체보다 남이 붙인 의미 때문에 자신의 선택을 미리 제한하지 않는 태도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그는 토니가 내미는 것을 받아들여 보고, 웃음에 참여하고, 잠시 익숙한 규칙 밖으로 나옵니다.
토니 역시 일방적인 구원자로 머물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셜리를 낯선 범주로 보며 익숙한 편견을 드러내지만, 이동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셜리가 겪는 모욕을 곁에서 봅니다. 자신에게 당연한 공간이 셜리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마주합니다. 셜리가 토니의 자유로운 행동을 조금씩 시험해 본다면, 토니는 셜리의 절제를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둘은 상대를 교정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견디는 방식을 가까이에서 보았기에 달라집니다.
이 변화는 셜리가 세 번에 걸쳐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장면을 보면서 제가 무엇을 먼저 보았는지를 적은 기록에 가깝습니다. 처음에는 토니의 활기와 영화의 웃음이 앞에 있었고, 그다음에는 셜리가 혼자 감당하는 시간이 들어왔습니다. 세 번째에는 두 감정이 함께 보였습니다. 이제 셜리는 차갑거나 따뜻하다는 한 단어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흑인 클럽 장면은 앞선 변화가 한곳에 모이는 순간입니다. 셜리는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합니다. 클럽 안의 사람들이 음악에 빨려 들어갈 때 저도 화면 밖에서 숨을 죽였습니다. 연주 실력이 새삼 증명돼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앞선 무대의 셜리는 초대받은 연주자였지만, 이곳에서의 연주는 자신이 들어가 앉은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한 번의 연주로 셜리와 공동체 사이의 모든 거리가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완전한 귀환으로 보면 영화가 쌓아 온 복잡함이 오히려 단순해집니다. 제게 크게 다가온 것은 그가 어느 집단의 대표처럼 행동하지 않아도 되는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품위를 증명하거나 편견을 반박하기 위한 연주가 아니라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과 음악을 나누는 선택. 치킨 장면의 작은 이탈이 클럽에서는 자기 의지로 고른 참여로 바뀝니다.
토니가 그 자리에 함께 있다는 점도 남습니다. 차 안에서 셜리에게 자기 방식의 즐거움을 건넸던 사람이 이제는 셜리가 택한 공간과 음악을 지켜봅니다. 둘의 관계는 운전기사와 고용인이라는 계약에서 출발했지만, 여행 뒤에는 상대가 편안해지는 방식을 기다릴 수 있는 사이로 움직입니다.
마지막 귀갓길에서 만난 경찰관은 처음에는 또 다른 위협처럼 보입니다. 앞선 경험 때문에 두 사람도 관객도 먼저 경계하게 됩니다. 하지만 경찰관은 차의 이상을 알려주고 길을 계속 갈 수 있게 도와줍니다. 제게는 차별이 사라졌다는 선언이라기보다, 마지막 목적지에 닿기 전까지 쌓인 긴장을 잠시 내려놓게 하는 전환으로 보였습니다.
첫 관람에서 크리스마스 결말은 고생 끝에 도착한 해피엔딩이었습니다. 두 번째에는 혼자 남을 셜리의 모습이 먼저 보여서 문을 두드리는 선택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세 번째에는 그 문을 여는 쪽도 함께 보였습니다. 셜리가 먼저 관계 안으로 들어가지만, 그 선택이 결말이 되려면 안쪽 사람들도 자리를 내어 주어야 합니다. 환대는 찾아가는 용기와 받아들이는 행동이 만날 때 완성됩니다.
여행 내내 셜리는 연주할 자리, 먹을 자리, 머물 자리가 서로 다르게 허락되는 현실을 지나왔습니다. 크리스마스에는 계약서나 공연 일정이 아니라 관계가 그의 자리를 만듭니다. 차별의 구조가 그 한밤에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두 사람이 서로에게 어떤 사람이 될지는 새로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셜리가 달라진 것보다 제가 그를 바라보던 거리가 달라졌다는 쪽에 더 가까웠습니다.
두 번 다 마지막 장면에서 눈시울이 붉어졌고, 세 번째부터는 혼자 술을 마시던 셜리까지 함께 떠올라 더 일찍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처음에는 웃기는 치킨 장면과 따뜻한 결말 사이만 보았습니다. 이제는 그 사이의 망설임, 견딤, 연주, 문을 두드리는 행동이 하나의 길로 이어집니다.
세 번째 관람이 바꾼 것은 셜리의 성격에 대한 답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거리를 오만함이라고 부르기 전에, 그가 어느 자리에서 밀려나고도 자세를 지켜야 했는지 한 번 더 살피게 된 제 판단이었습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