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스가 잊고 있던 성취를 돌려준 벤의 한마디 — 《인턴》

“이렇게 크고 멋진 회사는 네가 만든 거야. 그 자체로 대단한 업적이지. 나도 못 해봤고, 누구도 쉽게 해낼 수 없는 일이야.”

《인턴》을 보고 난 뒤 이상하게 오래 남은 것은 거창한 조언이 아니었습니다. 벤이 줄스에게 건넨 이 평범한 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은퇴한 70세 남성이 젊은 사람들로 가득한 스타트업에 인턴으로 들어간다는 설정이 재미있어 가볍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코미디 장면보다 이 짧은 대사가 더 또렷하게 기억됐습니다.

생각해 보면 벤은 줄스가 모르는 사실을 알려준 것도 아닙니다. 회사가 빠르게 성장했다는 것, 그 회사를 줄스가 직접 만들었다는 것은 누구보다 줄스 자신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기에 줄스는 그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직원이 몇 명 없던 시절부터 모든 일을 직접 챙기며 회사를 키웠지만, 규모가 커지자 외부 CEO를 영입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회사의 성장은 분명 줄스가 이룬 결과인데, 어느 순간 그 결과가 줄스가 물러나야 한다는 근거처럼 돌아옵니다. 남편의 외도 문제까지 겹치면서 일에서 한발 물러나면 가정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그녀를 흔듭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달려온 사람이 정작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며 자격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벤의 말이 필요했던 순간은 바로 여기였습니다.

그 한마디가 힘을 얻기까지 오래 기다린 벤

같은 말을 영화 초반의 벤이 했다면 지금처럼 깊이 남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좋은 문장이어서 힘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하기 전까지 벤이 보여준 행동이 문장의 무게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답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벤은 회사를 구해내는 천재도 아니고, 회의마다 화려한 아이디어를 내놓는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고 필요하지 않은 조언은 먼저 꺼내지 않습니다. 나이와 경험을 앞세워 자신이 답을 알고 있다는 태도도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줄스가 정신없이 움직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의 생활 방식을 성급하게 평가하거나 자기 방식으로 끌고 가지 않고 먼저 지켜봅니다. 언제나 빠르게 움직이는 줄스에게 삶의 속도를 늦추라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무엇 때문에 흔들리고 있는지를 오래 살핍니다.

그래서 벤의 침묵은 무관심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평소에 말을 아껴왔기에 꼭 필요한 순간에 꺼낸 문장은 충고보다 확인에 가까워집니다. 줄스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지금 그녀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바라본 셈입니다.

말보다 먼저 작은 일을 했습니다

벤이 신뢰를 얻는 과정에는 대단한 사건보다 사소한 행동이 많습니다. 사무실의 어질러진 책상을 정리하고, 동료가 곤란해졌을 때 소란스럽지 않게 돕습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경험을 증명하려 애쓰기보다 필요한 자리에 먼저 손을 보탭니다.

그 자신도 회사에서는 신입입니다. 젊은 동료들의 말투와 문화를 익혀야 하고, 익숙하지 않은 업무 환경에도 적응해야 합니다. 모르는 것을 감추지 않고 새로 배우려는 모습 덕분에 벤의 연륜은 권위로 굳지 않습니다.

이 점이 중요했습니다. 벤은 줄스의 세계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경험으로 그곳을 재단하지 않습니다. 먼저 그 세계의 규칙을 배우고, 사람들을 살피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줄스의 삶에 말을 얹기 전에 그 삶의 리듬 속에서 함께 움직였던 시간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인턴의 자리가 뒤집힙니다

회사 안에서 줄스는 벤의 보스입니다. 벤은 새로운 업무와 문화를 배워야 하는 인턴이지요. 그런데 줄스가 불안에 갇혀 자신의 판단을 믿지 못하는 순간에는 두 사람의 위치가 묘하게 바뀝니다.

그렇다고 벤이 갑자기 스승이 되고 줄스가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줄스는 벤에게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일할 기회를 주고, 벤은 줄스가 자신의 성취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도록 돕습니다. 각자 잘 아는 영역과 서툰 영역이 다르기에 누군가가 계속 가르치고 다른 사람이 계속 배우는 관계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사람이 어느 순간 서로의 인턴이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벤이 줄스에게 조언할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이 늘 옳다고 생각해서가 아닙니다. 자신 역시 줄스가 만든 세계에서는 배우는 사람으로 머물렀습니다. 그 태도가 있었기에 그의 경험은 설교가 되지 않고, 줄스 역시 벤의 말을 자신을 평가하는 판정처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줄스가 회사와 가정 사이에서 자신의 선택을 의심할 때, 벤은 새로운 성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막연하게 잘될 거라고 달래지도 않습니다. 대신 이미 눈앞에 존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회사는 네가 만들었다는 사실.

줄스가 CEO 문제와 가정 문제 때문에 자신의 능력까지 의심하고 있을 때 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근거로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을 근거로 현재의 판단을 다시 보게 합니다. 회사가 이렇게 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줄스가 무엇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인지 보여주는 증거였으니까요.

그래서 그 말은 막연한 “잘할 수 있다”와 다르게 들립니다. 줄스에게 없던 자신감을 벤이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불안 때문에 보이지 않던 자기 성취를 다시 볼 수 있게 해준 쪽에 가깝습니다.

《인턴》을 처음 볼 때는 세대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가까워지는지를 따라갔습니다. 다 보고 난 뒤에는 다른 생각이 남았습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말을 해주는 것보다, 그 말을 해도 되는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 먼저일 수 있겠구나.

벤은 줄스의 문제를 대신 해결하지 않습니다. CEO를 어떻게 할지 결정해 주지도 않고, 선택의 책임을 가져가지도 않습니다. 오랫동안 지켜보고 들은 뒤 줄스가 잠시 잊은 사실을 돌려줍니다.

회사는 네가 만들었다는 것. 네가 이미 해낸 일은 지금의 불안 때문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첫 장면의 평범한 문장이 오래 남았던 것 같습니다. 줄스에게 그 순간 필요했던 것은 새로운 답이 아니라,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보이지 않게 된 자신의 모습을 다시 보여주는 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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