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다시 올 때》, 다시 밖으로 나가기까지
《사랑이 다시 올 때》에서 제일 오래 남은 것은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보다 버디가 다시 밖으로 나가기 시작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생방송 토크쇼에서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뒤 버디는 딸 버니스를 데리고 고향 스미스빌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장소를 옮겼다고 삶까지 곧바로 다시 시작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동안 사람을 피하고 방 안에 머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고향에 돌아왔다는 사실과 다시 살아가기 시작했다는 말 사이에는 꽤 긴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가 그 거리를 줄이는 방식도 거창하지 않습니다. 버디가 어느 순간 모든 상처를 털어내고 새 사람이 되는 장면은 없습니다. 대신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 일자리를 알아보고, 딸의 곁을 지키고, 어머니와 조금씩 말을 섞고, 다시 누군가와 시간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버디가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고 느낀 첫 증거를 하나 고르라면 저는 사랑보다 먼저 구직을 떠올리게 됩니다.
방을 나서는 데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버디가 스미스빌로 돌아오게 된 계기는 꽤 잔인합니다. 친구 코니의 부탁으로 출연한 생방송 토크쇼에서 남편 빌과 코니의 관계가 드러나고, 그 순간이 많은 사람에게 그대로 방송됩니다. 처음에는 실제로 이런 일이 있을까 싶을 만큼 과한 설정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오래 바라보는 것은 공개적인 배신의 충격보다 그 뒤에 남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딸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왔지만 버디는 곧바로 새 출발을 준비하지 않습니다. 익숙한 장소에 돌아왔는데도 사람을 만나기가 싫고, 예전의 자신을 아는 사람들 앞에 서는 일도 부담스럽습니다. 방 안은 상처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오래 있을수록 바깥의 시간과도 멀어집니다.
힘든 시기에 연락을 피하고 사람들에게서 멀어지는 마음을 저도 어느 정도 알아서 이 모습이 유난히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음이 복잡할수록 누군가를 만나는 일보다 그냥 문을 닫는 쪽이 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멈춰 있다고 해서 일상까지 같이 멈춰 주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첫 번째 움직임은 일자리를 찾으러 나가는 일이었다
버디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느낀 가장 분명한 장면은 일을 구하러 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일자리를 알아본다고 마음의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생활이 바로 안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방 안에서 생각만 하는 것과 직접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나고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것은 전혀 다른 행동입니다.
저도 실패한 것 같은 기분에 아무것도 하기 싫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단정하게 옷을 입고 밖에 나갔는데 막상 갈 곳이 없어 더 허탈했던 적도 있습니다. 시작하려는 마음은 생겼는데 자신감은 따라오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버디가 다시 일자리를 찾는 모습도 성공담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직 흔들리고 있는데도 일단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이 영화에서 회복은 마음이 먼저 완벽하게 정리되고 행동이 따라오는 순서가 아닙니다. 행동이 먼저 생기고 그 뒤에 조금씩 일상이 붙습니다. 버디가 웃을 수 있어서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오는 일을 반복하면서 다시 웃을 순간도 생깁니다.
다시 멈출 수도 있었던 순간, 어머니의 죽음
버디와 어머니의 관계도 처음부터 편안하지는 않습니다. 가까운 가족이라 더 쉽게 부딪히고, 서로 걱정하면서도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버디가 고향에 돌아온 뒤에도 어머니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 사람 사이의 날카로운 부분이 조금씩 누그러집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장면이 더 아프게 남습니다. 이제야 천천히 서로를 다시 볼 시간이 생긴 것 같았는데 그 시간이 끊깁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가까운 사람에게는 나중에 말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가족에게 괜한 짜증을 내고도 언젠가 풀면 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영화 속 두 사람에게는 그 ‘언젠가’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만 어머니의 죽음이 버디를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버디는 이미 그전부터 밖으로 나가고 있었고 자기 생활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와 조금 가까워진 뒤 찾아온 상실은 그 흐름을 시작하게 한 원인이라기보다, 이미 움직이고 있던 버디에게 또 하나의 상실을 얹는 사건에 가깝습니다.
혼자 걷던 하루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버디가 다시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고 해서 곧바로 혼자 살아가는 데 익숙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다음부터는 자신만의 상처가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들의 시간까지 보게 됩니다. 버니스의 불안도, 저스틴과의 관계도 버디가 완전히 회복된 뒤에 찾아오는 보상이 아니라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삶 안으로 들어오는 다음 단계에 가깝습니다.
버니스는 기다려주지 않는 현재였다
영화를 볼수록 버디 못지않게 버니스가 신경 쓰였습니다. 아이는 부모의 갈등을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는데도 전학을 가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어른들의 결정이 만든 결과를 그대로 살아냅니다. 겉으로는 씩씩해 보여도 아버지를 만났을 때의 표정에는 여전히 기대가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가려고 울며 뛰어가는 모습은 특히 아픕니다. 버니스에게는 부모의 관계가 끝났다는 사실보다 ‘아빠가 나까지 떠날 수 있다’는 감각이 더 직접적이기 때문입니다. 버디 역시 자기 배신과 상실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딸 역시 자기 방식으로 같은 사건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합니다.
버니스와 서로를 안는 장면이 그래서 좋았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단번에 치료해 주는 장면은 아닙니다. 오히려 둘 다 아직 힘든 상태에서 그래도 곁에 남겠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버디는 상처 입은 사람인 동시에 누군가의 엄마이고, 그 역할은 버디가 완전히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저스틴은 가장 늦게 들어온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친구 저스틴과의 관계도 이 흐름 뒤에 놓고 보면 다르게 보입니다. 처음부터 새로운 사랑이 버디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구조였다면 이 영화가 훨씬 익숙하게 느껴졌을 겁니다. 하지만 버디는 저스틴과 관계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밖으로 나가고, 일을 찾고, 딸의 곁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스틴은 버디의 상처를 없애는 해결사라기보다, 버디가 다시 사람을 믿어 볼 수 있는지를 확인하게 하는 인물에 가깝습니다. 한 번 크게 배신당한 사람에게 새로운 관계는 설렘만으로 시작되기 어렵습니다. 상대의 호의를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일, 함께 평범한 시간을 보내는 일도 작은 선택이 됩니다.
두 사람이 보내는 시간이 유난히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거창한 로맨스의 장면보다 별일 없는 시간을 같이 보내는 모습이 더 중요해 보였습니다. 새로운 사랑이 버디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것이 아니라, 버디가 이미 조금씩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저스틴과의 관계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셈입니다.
처음에는 90년대 감성의 익숙한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 보고 나면 새 사랑보다 한 사람이 다시 자기 하루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 더 오래 남습니다. 버디가 얻은 힘은 상처가 사라진 상태도 아니고, 모든 관계가 원래대로 돌아간 결말도 아닙니다.
일자리를 알아보고, 딸의 곁에 남고, 상실을 겪은 뒤에도 다시 사람을 만나고, 누군가의 호의를 받아들입니다. 하나씩 떼어놓으면 아주 작은 행동들입니다. 하지만 방 안에만 머물던 처음의 버디와 비교하면 그 작은 행동들이 쌓인 거리가 꽤 멉니다.
그래서 《사랑이 다시 올 때》가 제게 남긴 위로도 거창한 용기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오늘 완전히 괜찮아지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내일 다시 옷을 입고, 문을 열고, 갈 곳을 하나 찾아볼 수 있다면 삶은 이미 조금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버디가 되찾은 것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자신감이라기보다, 다음 날에도 한 번 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정도의 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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