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트풀 8》, 총을 쏘기 전에 이미 싸움은 시작됐다
링컨 대통령의 편지는 《헤이트풀 8》에서 이상할 만큼 오래 힘을 가집니다. 종이 한 장일 뿐인데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워렌을 다시 바라보고, 누군가는 그 편지 때문에 그의 말을 조금 더 믿습니다. 총도 아니고 돈도 아닌데 사람 사이의 거리를 바꿉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총격이 언제 시작될지가 가장 궁금했습니다. 눈보라 속 잡화점에 수상한 사람들이 모였으니 결국 누군가 먼저 무기를 꺼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볼수록 싸움은 훨씬 일찍 시작돼 있었습니다.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를 믿게 만들고, 상대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살피는 순간부터 이미 공격과 방어가 오갑니다.
상영 시간이 길고 대부분의 이야기가 한 공간에서 진행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저도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막상 보고 있으면 공간이 좁아서 답답하다기보다, 그 안에서 누가 어떤 정보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불안해집니다. 한 사람이 말을 시작하면 다른 사람의 눈이 움직이고, 대답이 늦어지면 그 침묵까지 의심하게 됩니다.
이 방에서는 말하는 사람이 먼저 공격한다
워렌의 링컨 편지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기 위한 소품으로만 쓰이지 않습니다. 편지를 믿는 사람은 워렌을 단순한 현상금 사냥꾼으로 보기 어려워지고, 그의 말에도 전보다 무게를 싣게 됩니다. 워렌은 그 효과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편지가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앞에서 만들어진 신뢰도 흔들립니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워렌의 모든 말이 거짓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그다음부터는 무엇을 말했는가보다 왜 그 말을 했는지를 더 보게 됩니다. 워렌은 상대가 믿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첫 관람에는 편지가 진짜인지 가짜인지가 중요했습니다. 다시 볼 때는 편지보다 그것을 읽은 사람들의 반응이 먼저 들어왔습니다. 누군가는 표정이 부드러워지고, 누군가는 워렌을 이전보다 다르게 대합니다. 편지는 사실을 증명하지 못했지만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스미더스와 마주 앉은 장면에서는 대사의 공격성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워렌은 그의 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길게 꺼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어디까지 사실인가만이 아닙니다. 워렌이 왜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스미더스에게 남은 선택은 점점 줄어듭니다.
가만히 있으면 모욕을 견뎌야 하고, 움직이면 워렌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 들어갑니다. 말 몇 마디로 상대를 설득하는 장면이 아니라, 이야기를 길게 이어 가며 상대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을 하나씩 없애는 장면처럼 보였습니다. 총은 마지막에 등장하지만 공격은 훨씬 전부터 시작된 셈입니다.
잡화점 안의 다른 대화들도 비슷합니다. 존 루스는 손님들의 총을 거두며 눈앞의 위험을 줄이려 하고, 워렌은 질문으로 상대의 설명에 틈이 있는지 확인합니다. 매닉스는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계속 판단해야 하고, 도모그는 묶여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고 해서 대화에서도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도모그가 매닉스에게 말을 걸 때 특히 그렇습니다. 몸은 묶여 있지만 상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누구를 믿지 못하는지를 파고들 틈은 남아 있습니다. 잡화점 안의 신뢰가 이미 흔들린 뒤라면 작은 의심 하나만 던져도 기존 판단은 쉽게 흔들립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답변도 방어가 됩니다. 너무 빨리 대답하면 준비한 말처럼 들리고, 머뭇거리면 뭔가 숨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침묵해도 의심받고, 설명을 길게 할수록 또 다른 모순이 생길 수 있습니다. 같은 얼굴을 계속 마주 보고 있어야 하는 좁은 공간이라 방금 한 말과 다음 행동이 맞는지도 금방 드러납니다.
관객도 잡화점 안에서 같은 방식으로 속는다
커피에 독이 들어가는 대목은 이 영화가 인물들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시선까지 이용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워렌과 스미더스의 대치가 강한 감정과 위협을 만들어내는 동안 자연스럽게 시선은 그쪽에 머뭅니다. 화면 안에서 다른 움직임이 벌어져도 그것을 중요한 사건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영화가 결정적인 순간을 완전히 숨긴다기보다, 더 급해 보이는 대화를 앞에 세워 관객 스스로 다른 곳을 놓치게 만듭니다.
처음 봤을 때 저 역시 스미더스와 워렌 사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만 기다렸습니다. 다시 보니 대화를 듣는 사람들의 눈과 손이 더 불안하게 느껴졌습니다. 누가 어느 순간 시선을 옮겼는지, 누가 평소와 다르게 조용해졌는지 같은 작은 반응들이 결과를 알고 나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독이 든 커피가 등장한 뒤에는 평범했던 행동까지 의심의 대상이 됩니다. 누가 마셨는지, 누가 알고 있었는지, 누가 모른 척했는지를 다시 따지게 됩니다. 이전까지 말로만 유지되던 불신이 몸의 고통으로 터지면서 잡화점 안의 힘의 관계도 한꺼번에 바뀝니다.
이 지점에서야 초반의 느린 호흡이 왜 필요했는지도 조금 이해됐습니다. 그동안 관객은 누가 거짓말하는지 추측하고, 한 사람을 잠시 믿었다가 다음 말에 다시 의심했습니다. 그 판단이 여러 번 흔들린 뒤에야 폭력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후반의 총격과 독살은 갑자기 삽입된 자극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로 만들어 놓은 우위와 불신이 더는 대화만으로 유지될 수 없게 됐을 때 몸의 충돌로 바뀌는 것에 가깝습니다.
총이 등장한다고 해서 영화의 규칙이 갑자기 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지, 누가 상대의 말을 믿고 있는지, 누가 누구를 의심하는지가 여전히 결과를 좌우합니다. 단지 그전까지 문장으로 움직이던 힘이 더 직접적인 형태를 갖게 됩니다.
이 영화를 다시 볼 때는 범인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것보다 질문을 던지는 사람을 따라가 보는 편이 더 재미있었습니다. 왜 지금 그 질문을 했는지, 그 말을 들은 사람의 태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주변 인물의 시선은 어디로 움직이는지를 보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링컨의 편지를 보게 됩니다.
첫 관람에서는 그것이 진짜인지가 궁금했습니다. 이제는 워렌이 왜 그 편지를 가지고 다니는지보다, 사람들이 그 편지를 본 뒤 무엇을 다르게 하는지가 더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편지는 가짜일 수 있지만 그 편지가 만들어 낸 신뢰와 행동의 변화까지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헤이트풀 8》에서 총은 싸움을 시작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누군가가 질문하고, 다른 사람이 대답하고, 그 말을 믿거나 의심하는 순간부터 이미 승부는 움직이고 있습니다. 총성이 들릴 때는 오히려 오래 이어진 대화가 더는 숨을 곳이 없어진 뒤입니다.
그래서 다시 본다면 링컨의 편지가 처음 등장하는 순간부터 한 가지만 따라가 보고 싶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그다음 행동을 어떻게 바꾸는가. 그 질문 하나를 놓치지 않고 보면, 잡화점 안의 긴 대화가 총격 전의 대기 시간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인 결투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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