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메이드, 위험해질수록 더 빨라지는 영화
CIA와 마약 카르텔을 다룬 영화가 이렇게 가볍게 흘러갈 줄은 몰랐습니다. 《아메리칸 메이드》는 시작부터 예상했던 범죄영화와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항공사 조종사 배리 씰이 승객을 태운 여객기를 몰다가 동료가 잠든 틈에 슬그머니 장난을 칩니다. 대체 저 사람은 왜 저러나 싶어 웃었는데, 나중에 보면 이 짧은 장면이 배리를 꽤 잘 보여줍니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좀처럼 심각해지지 않는 배리의 성격이 영화 전체의 빠르고 경쾌한 분위기와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CIA 비밀 작전과 마약 카르텔이라는 소재만 보면 어둡고 잔혹한 범죄극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이 작품은 사건의 위험을 감추지는 않으면서도 관객을 오래 짓누르는 방식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배리가 새로운 일을 제안받고 임무의 범위를 넓혀 갈수록 상황은 심각해지는데, 정작 그는 겁에 질려 멈추기보다 눈앞의 기회를 재빨리 붙잡습니다. 관객도 사건의 무게를 곱씹기 전에 다음 비행과 거래로 넘어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래서 가벼운 범죄 모험극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런데 배리가 하는 일을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전혀 가볍지 않습니다. 국가기관의 비밀 임무에 관여하고, 마약 카르텔과 엮이고, 경찰에 쫓깁니다. 이상한 것은 사건이 심각해질수록 영화가 함께 무거워지는 대신 오히려 더 빠르게 다음 상황으로 넘어간다는 점입니다.
위험이 커질수록 영화는 더 빨리 움직인다
첫 여객기 장난은 그래서 단순한 웃음거리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배리는 규칙 안에서 안정적으로 사는 조종사이면서도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고 작은 위험을 만들어 즐기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 그에게 CIA 요원 셰이퍼가 접근하자 직업이 갑자기 바뀌었다기보다 이미 있던 성향이 더 큰 무대로 옮겨 간 듯한 흐름이 생깁니다.
제안을 놓고 오래 고민하기보다 비행과 실행이 앞섭니다. 임무 하나가 끝나기도 전에 더 위험한 일이 붙습니다. 하나를 넘기면 또 하나가 생기고, 그것까지 해결하려다 더 큰 일에 들어갑니다. 배리도 멈춰 서서 자신이 어디까지 왔는지 돌아보지 않습니다.
콜롬비아에서 경찰에 붙잡히는 과정도 같은 리듬을 따릅니다. 보통의 범죄극이라면 체포가 긴 추락의 시작이 되겠지만, 여기서는 배리가 처한 곤란과 그를 둘러싼 세력의 힘이 빠르게 충돌합니다. 위기에서 빠져나왔다고 안심할 틈도 길지 않습니다. 문제가 해결될수록 안전해지는 대신 다음 위험에 더 깊이 들어갑니다.
장면은 가볍게 흘러가는데 상황 자체는 계속 나빠지고 있습니다. 웃으면서 보다가도 어딘가 불안한 이유입니다.
아칸소로 옮긴 뒤에는 속도감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돈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쌓이고 숨길 곳을 찾아야 하며, 자신을 보호해 줄 것 같던 조건도 언제든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성공의 결과를 여유롭게 누리기보다 돈과 일을 처리하느라 계속 분주합니다. 집과 생활은 커지는데 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히려 좁아집니다.
해결할수록 더 깊이 들어간다
보통이라면 성공한 뒤 추락하는 과정을 나눠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메리칸 메이드》에서는 두 과정이 거의 동시에 진행됩니다. 일이 커질수록 돈은 늘어나지만 위험에서도 빠져나오기 어려워집니다. 배리가 위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추락은 이미 함께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려한 액션이 계속되지 않아도 영화의 호흡은 좀처럼 느려지지 않습니다. 위험한 일을 농담으로 바꾸기 때문이라기보다 위험을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객이 하나의 사건을 판단하려는 순간 배리는 이미 다음 사건으로 날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속도를 끝까지 유지하게 만드는 것은 사건만이 아닙니다. 그 한가운데에 있는 배리라는 인물 자체가 좀처럼 브레이크를 밟지 않습니다.
톰 크루즈가 해결사가 아닌 사고뭉치가 될 때
톰 크루즈에게서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 헌트나 《탑건》의 매버릭처럼 위기를 통제하는 인물을 기대했다면 배리 씰은 꽤 낯섭니다. 이 사람은 상황을 완전히 장악해서 멋있는 영웅이 아닙니다. 허술할 만큼 낙관적이고, 도덕적으로 위험한 선택도 능청스럽게 다음 일처럼 받아들입니다. 대담함과 무책임함이 한 표정 안에 붙어 있어 웃으면서도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벌일지 걱정하게 됩니다.
익숙한 톰 크루즈의 활력도 이번에는 배리를 영웅으로 만드는 데 쓰이지 않습니다. 문제가 생겨도 죄책감에 오래 머무르기보다 조종석으로 돌아가거나 다음 일을 받아들입니다. 잘못된 선택이 하나씩 쌓이는 걸 알면서도 다음 행동을 보고 싶어집니다.
이 차이가 개인적으로 꽤 재미있었습니다. 익숙한 톰 크루즈라면 위기가 커질수록 해결책을 찾아낼 것 같은데, 배리는 위기를 해결하는 만큼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잘 날고, 잘 빠져나오고, 또 다른 기회를 붙잡는 능력이 오히려 그를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갑니다. 능력이 많아서 살아남는 인물이면서 그 능력 때문에 멈추지 못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배리 씰이 실존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이런 인물을 보고 난 뒤 또 다른 호기심을 만들었습니다. 저도 영화를 다 본 뒤 실제 배리 씰을 검색해 봤습니다. 영화와 현실 사이에 생각보다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오히려 작품이 무엇을 선택했는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영화 속 CIA 요원 셰이퍼와 배리의 관계를 실제 기록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작품은 실존 인물과 당시 사건에서 출발하지만 여러 인물과 사건의 순서, 관계를 빠른 범죄영화의 흐름에 맞게 재구성합니다. 배리 씰의 생애를 정확하게 따라가는 전기영화라기보다 그의 삶에서 소재를 가져와 다시 구성한 범죄 모험극으로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실제 배리 씰의 행적이나 당시 미국 정부와 중남미의 관계가 궁금하다면 영화와 별도로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반대로 그런 배경지식 없이 영화를 먼저 보더라도 이야기의 속도를 따라가는 데 큰 부담은 없습니다. 실화라는 사실은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숙제라기보다 영화를 보고 난 뒤 현실의 이야기를 찾아보게 만드는 출발점에 가깝습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처음 느꼈던 경쾌함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배리는 계속 움직였고 위기에서도 몇 번이나 빠져나왔지만, 그렇다고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일이 커질수록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줄어듭니다. 영화가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에 그 변화가 잘 보이지 않았을 뿐입니다.
범죄물의 긴장은 원하지만 유혈과 침울한 분위기가 감상의 중심인 영화는 부담스러운 날이라면 잘 맞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실존 인물의 생애나 CIA와 카르텔을 둘러싼 역사적 책임을 촘촘하게 파고드는 작품을 기대한다면 부족하게 느껴질 겁니다. 저 역시 별다른 부담 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두 시간이 짧게 느껴질 만큼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보고 나면 영화 첫머리의 여객기 장난도 조금 달리 기억됩니다. 그때는 그저 심각해지지 않는 조종사의 엉뚱한 행동이 웃겼습니다. 하지만 이후의 배리를 알고 돌아보면,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고 작은 위험을 즐기던 그 모습에서 이미 이후의 선택들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아메리칸 메이드》는 범죄의 무게를 없애서 가벼운 영화가 아닙니다. 배리가 위험 하나를 빠져나오기도 전에 다음 위험으로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그 무게를 오래 느낄 틈이 적은 영화에 가깝습니다. 처음에는 그 속도가 재미있었고, 끝에 가서는 바로 그 속도 때문에 배리가 얼마나 멀리 와 버렸는지가 보였습니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했던 비행이 어느 순간 멈출 수 없는 비행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위험해질수록 더 빨라진다는 그 감각이 제가 이 영화를 기억하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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