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장남자와 남장여자, 두 영화가 같은 시기에 함께 언급되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조정석 주연의 <파일럿>은 개봉 당시 관객들 사이에서 "생각보다 훨씬 재밌다"는 입소문이 끊임없이 흘러나왔습니다. 저 역시 큰 기대 없이 극장에 들어갔다가 눈물이 날 정도로 웃고 나온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습니다. 남자가 여장을 하는 <파일럿>과, 여자가 남장을 하는 <쉬즈 더 맨>. 방향은 정반대지만, 두 영화는 과연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를까.
여장남자 코미디의 공식, 파일럿은 어떻게 풀었을까
남자 주인공이 여자로 변장하는 이야기는 사실 영화와 연극에서 꽤 오래전부터 써먹던 방식입니다. 크로스드레싱(Cross-dressing)이라고 부르는데, 이걸 잘 쓰면 웃음도 주고 긴장감도 만들어낼 수 있어서 코미디 장르에서 특히 많이 등장합니다. 제가 극장에서 직접 느낀 것도 비슷했습니다. 이런 장르는 배우의 연기와 타이밍이 전부입니다. 너무 과하면 보는 사람이 민망해지고, 반대로 너무 자연스러우면 장르 특유의 아슬아슬한 재미가 사라집니다.
<파일럿>은 그 균형을 꽤 영리하게 잡아냈습니다. 잘 나가던 스타 기장 한정우가 하루아침에 해직되고, 재취업에 실패하면서 여동생의 신분을 빌려 다시 취업에 도전한다는 설정은 생각보다 설득력이 있습니다.
특히 면접 장면은 극장 전체가 웃음으로 뒤집어졌던 순간이었습니다. 명백히 웃음을 노린 장면인데도 배우들의 호흡이 워낙 좋아서 억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메이크업을 받으며 투덜거리는 대사, 몸에 붙인 테이프가 위기의 순간 정직하게 떨어지는 장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한 슬랩스틱으로 밀어붙이기보다, "저 사람이 진짜 저 상황에 놓인다면?"이라는 상상을 끝까지 유지합니다.
<파일럿>의 가장 큰 장점은 여기서 나옵니다. 개연성을 놓지 않는다는 것. 황당한 설정인데도 끝까지 납득하면서 웃게 만드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인데 이 영화는 꽤 능숙하게 해냅니다.
남장여자 코미디하면 생각나는 영화, 쉬즈 더 맨
반대로 <쉬즈 더 맨>은 변장의 방향 자체가 다릅니다. <파일럿>이 이미 가졌던 자리를 잃고 그걸 되찾기 위해 신분을 빌린다면, <쉬즈 더 맨>은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던 기회를 얻기 위해 신분을 빌립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십이야>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영화인데, 여자 축구팀이 해체되고 남자팀 합류마저 거부당한 바이올라가 쌍둥이 오빠로 변장해 기숙학교 남자팀에 들어갑니다. 오빠를 대신해 억지로 떠맡은 게 아니라, 그 빈자리를 스스로 이용해 원래 자신에게 막혀 있던 기회를 되찾으려 한 셈입니다.
처음 봤을 때는 그저 유쾌한 하이틴 로맨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다시 보니, 의외로 지금 봐도 촌스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놀라웠던 건 영화가 남성과 여성에게 기대되는 역할을 꽤 자연스럽게 건드린다는 점이었습니다. 바이올라는 남자로 보이기 위해 목소리를 낮추고 다리를 벌리고 앉는 걸 연습합니다. 당시에는 그냥 웃긴 장면이었는데, 지금 보면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이라는 게 결국 몇 가지 정해진 행동을 얼마나 잘 흉내 내느냐의 문제였다는 걸 영화가 슬쩍 까발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영화가 진지한 이야기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하이틴 코미디의 문법을 따릅니다. 그래서 더 좋았습니다. 최근 코미디 영화들이 지나치게 복잡한 메시지를 담으려다 무거워지는 경우가 많은데, <쉬즈 더 맨>은 그냥 끝까지 즐겁습니다. 아만다 바인즈가 어설픈 남장을 한 채 룸메이트 듀크와 대화하는 장면들은 지금 다시 봐도 웃음을 참기 힘들 정도입니다.
넷플릭스 같은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요즘도 종종 다시 언급되는 걸 보면, 시대는 변했지만 정체를 숨긴 채 벌이는 소동극 자체는 여전히 잘 먹히는 것 같습니다.
두 영화를 나란히 놓고 보면 어떤 차이가 보일까
두 작품을 나란히 놓고 보면 가장 큰 차이는 웃음을 만드는 방식입니다. <파일럿>은 현실적인 한국식 상황 코미디에 가깝습니다. 낯선 성별로 살아가며 겪는 불편함과 난감한 순간들이 웃음으로 이어집니다. 관객은 "저 상황이면 나도 저럴 것 같다"며 공감하게 됩니다. 반대로 <쉬즈 더 맨>은 관계의 엇갈림에서 웃음을 만듭니다. 관객은 모든 진실을 알지만 등장인물들만 계속 속고 있는, 그 아이러니를 끝까지 밀어붙이며 삼각관계와 정체 노출의 위기를 반복합니다.
두 영화 모두 변장이라는 같은 장치를 쓰지만, 접근 방식은 완전히 다릅니다. <파일럿>이 생활 밀착형 코미디라면, <쉬즈 더 맨>은 캐릭터 중심의 하이틴 코미디입니다. 하나는 현실에서 웃음을 찾고, 다른 하나는 관계 속 혼란에서 웃음을 만듭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두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남는 느낌은 비슷합니다. 사람 겉모습만 보고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 남 입장이 되어보면 의외로 많은 게 달라 보인다는 생각. 완성도 높은 코미디는 이래서 시대를 잘 안 타나 봅니다.
그래서 지금 어떤 영화를 먼저 보면 좋을까
두 작품 모두 저마다의 매력이 분명합니다. 가족과 함께 편하게 웃고 싶다면 <파일럿>을 추천합니다. 극장에서 남녀노소가 같은 타이밍에 웃음을 터뜨리던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만큼 대중적인 영화입니다. 반대로 아무 생각 없이 하이틴 감성에 빠지고 싶은 밤이라면 <쉬즈 더 맨>이 더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복잡한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마음껏 웃으며 스트레스를 풀게 해주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만큼 가볍고 상쾌한 청량감을 주는 작품도 드뭅니다.
저는 <쉬즈 더 맨>을 먼저 보고, 그 다음에 <파일럿>으로 마무리하는 순서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20년 가까운 시간을 사이에 두고 만들어진 두 영화가 의외로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걸 그때 알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만약 내가 저 사람의 입장이 된다면 어떨까?"
두 영화 다 이 질문을 무겁게 다루지는 않습니다. 코미디의 문법 안에서 슬쩍 던지고 지나갈 뿐인데, 다 보고 나면 이 질문 하나가 계속 맴둡니다. 좋은 코미디란 원래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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