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간의 나를 저장할까? 《컨택트》에서 시작된 생각
시간이 필름처럼 수많은 프레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상상해 봅니다. 오늘의 나, 가장 행복했던 날의 나, 아직 몸도 마음도 지치지 않았던 시절의 나가 각각 한 칸씩 놓여 있는 겁니다. 그 가운데 원하는 한 프레임을 골라 몸과 기억, 성격까지 온전히 저장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나중에 크게 후회할 일이 생기면 그 시점의 나를 다시 불러옵니다. 게임에서 저장한 지점으로 돌아가듯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요. 꽤 솔깃한 상상입니다.
《컨택트》를 보고 나니 오래전에 읽은 이영도 작가의 《퓨처워커》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두 작품이 같은 방식으로 시간을 다룬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시간을 앞에서 뒤로 흘러가는 한 줄로만 생각하지 않게 만든다는 점에서 오래된 독서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저는 SF를 보고 나면 작품이 직접 보여주지 않은 곳까지 생각이 뻗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에는 그 상상이 ‘저장과 복구’라는 쪽으로 흘러갔습니다.
시간이 프레임이라면
우리는 과거를 이미 지나간 것으로, 미래를 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손에 잡히는 것은 현재뿐이고 나머지는 기억하거나 예상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컨택트》에서 루이즈가 경험하는 시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딸과 함께했던 과거의 기억처럼 보였던 장면들이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관객 역시 루이즈와 함께 지금까지 보고 있던 장면의 위치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만약 모든 순간이 이미 하나의 구조 안에 놓여 있다면 어떨까요. 시간은 흘러가 버리는 물보다 펼쳐진 필름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중 한 프레임 안에 서 있기 때문에 다음 장면을 알 수 없지만, 필름 전체를 볼 수 있다면 앞과 뒤의 구분도 지금과는 달라질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재미있게 느낀 질문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습니다. 전체 시간을 볼 수 있다면, 인간은 그 시간을 받아들이고 싶어 할까요. 아니면 어떻게든 원하는 장면으로 돌아가려 할까요.
한 시점의 나를 저장할 수 있다면
이 생각을 기술 쪽으로 조금 더 밀어붙여 봤습니다. 한 시점의 나를 데이터로 저장할 수 있다고 가정해 보는 겁니다. 기억과 성격, 감정의 습관까지 기록할 수 있다면 특정한 순간에 일종의 저장 지점을 만드는 셈입니다.
《공각기동대》나 《채피》를 볼 때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의 의식과 몸을 어디까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을까. 기억과 자아를 정보로 옮길 수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같은 사람일까.
물론 이것을 현실의 기술 이야기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SF적인 사고실험입니다. 그래도 상상은 쉽게 멈추지 않습니다. 실패하기 전의 나, 병들기 전의 나, 무언가를 잃기 전의 나를 저장해 두었다면 우리는 결국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그런데 《컨택트》를 떠올리면 여기서 묘한 차이가 생깁니다. 루이즈에게는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순간을 불러와 다시 플레이하는 기능은 없습니다. 알 수 있게 되었지만 마음대로 고칠 수 있게 된 것은 아닙니다.
복구된 나는 정말 같은 나일까
저장된 나를 다시 불러왔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기억과 말투, 성격까지 모두 같다면 저는 그 존재를 자연스럽게 ‘나’라고 부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금 생각하면 이상해집니다.
저장된 뒤 지금까지 살아온 제가 사라지고 예전 상태의 제가 다시 나타난다면, 정말 제가 돌아간 것일까요. 아니면 저와 똑같은 기억을 가진 또 다른 존재가 이어받은 것일까요.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 사이에 있었던 시간입니다. 사랑했던 기억도 있고 실패한 기억도 있을 겁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미안해했던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과거의 상태로 돌아가는 순간 그것들은 경험하지 않은 일이 됩니다.
처음에는 그게 저장 기능의 가장 큰 장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계속 되돌릴 수 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관계가 틀어지면 돌아가고, 선택을 잘못하면 또 돌아갑니다.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저장 지점을 불러오면 되니까요.
그렇게 살면 실패는 줄어들지도 모릅니다. 대신 끝까지 살아본 선택도 줄어들 수 있습니다. 수없이 복구한 나는 점점 완벽해지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선택도 끝까지 확정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죽음을 계속 미룬다면 영생일까
생각은 자연스럽게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몸이 늙거나 크게 손상될 때마다 저장된 자아를 다른 몸이나 매체에서 다시 실행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겉으로 보면 한 사람이 계속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저는 처음에는 이것을 꽤 간단하게 영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앞의 질문이 그대로 남습니다. 죽기 전의 내가 정말 다음 복구 상태에서 눈을 뜨는 것인지, 아니면 나와 같은 기억을 가진 존재가 새로 시작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상상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영생 자체보다 ‘어디까지를 나라고 부를 것인가’에 있는 것 같습니다. 몸이 바뀌어도 나일까요. 기억만 같아도 나일까요. 그 기억의 일부를 지워버리면 언제부터 다른 사람이 되는 걸까요.
《컨택트》의 시간은 이런 기술적 복구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비교해 볼 만합니다. 시간을 넘어서는 방법이 꼭 과거를 다시 실행하는 능력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아주 먼 곳까지 갈 수 있다면
자아를 데이터처럼 오래 보존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다 보면 우주여행까지 생각이 이어집니다. 인간의 수명보다 훨씬 긴 이동이 필요하다면 여행하는 동안 몸을 그대로 유지하는 대신, 언젠가 다시 깨어날 상태만 보존한다는 상상입니다.
실제로 가능한 기술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냥 SF를 보다가 떠오른 생각입니다. 그래도 재미있습니다. 사람이 자신의 짧은 생물학적 시간을 벗어날 수 있다면 지금은 갈 수 없는 거리까지 이동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때도 같은 질문이 따라옵니다. 수백 년 뒤 목적지에서 깨어난 존재는 지구에서 출발한 그 사람일까요. 아니면 출발한 사람의 기억을 이어받은 다른 존재일까요.
시간을 넘어섰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루이즈는 시간을 다시 고치려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다시 《컨택트》로 돌아오면 루이즈의 선택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루이즈는 딸과 함께할 행복한 시간뿐 아니라 결국 그 아이를 잃게 될 미래와, 그 이후 자신의 삶이 달라질 것까지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피하는 쪽으로 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이 선택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미래에 그렇게 큰 슬픔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시작하지 않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우리가 저장 기능을 갖고 있다면 아마 대부분은 고통스러운 결과가 나타나는 경로를 피하려 할 겁니다.
그런데 루이즈에게 시간은 수정해야 할 오답지가 아닙니다.
딸을 사랑하게 될 것도 알고, 그 사랑이 언젠가 상실로 이어질 것도 압니다. 그래도 슬픔만 떼어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슬픈 결말이 있다는 이유로 그 앞에 있었던 행복까지 없었던 일로 만들지는 않는 겁니다.
저는 이 부분이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았습니다. 행복했던 시간이 나중의 고통 때문에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끝이 있다는 사실과 그 시간이 소중했다는 사실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아픈 미래를 알면서도 시작한다는 것
《컨택트》를 보면서 저는 과거의 아픔이나 앞으로 닥칠 미래의 두려움을 견디게 하는 힘이 어디에서 오는지 생각했습니다. 결국 사람을 붙잡아 주는 것은 이미 가지고 있는 행복한 기억일 수도 있고, 아직 오지 않은 행복을 기대하는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고통을 이런 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상실에는 상실대로 견디기 어려운 무게가 있습니다. 영화가 그것을 가볍게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오히려 루이즈의 선택이 더 이상하게, 그리고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끝을 모르는 사람이 사랑을 시작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끝을 알고도 시작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루이즈는 좋은 순간만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행복과 상실이 한 묶음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 시간을 선택합니다.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것
처음에는 시간을 초월한다는 말을 원하는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저장하고, 실패하면 복구하고, 죽음까지 계속 미룰 수 있다면 인간은 시간을 어느 정도 지배하게 된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런데 《컨택트》를 보고 나면 다른 방식도 생각하게 됩니다.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 반드시 시간을 마음대로 고치는 일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도 그 시간을 자신의 삶으로 선택할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시간을 대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대단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정말 복구 기능이 생긴다면 가장 행복했던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몇 번이고 되돌아가다 보면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과 아직 경험하지 못한 행복도 함께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처음의 질문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어느 시간의 나를 저장할 것인가보다, 저장해 둔 과거가 있어도 나는 계속 다음 프레임으로 갈 수 있을까.
《컨택트》는 그 답을 기술로 보여주는 영화는 아닙니다. 루이즈는 시간을 되돌리지 않습니다. 대신 끝을 알고도 그 안으로 들어갑니다. 저는 그 선택을 보면서 시간을 초월하는 가장 놀라운 능력이 미래를 바꾸는 힘이 아니라, 때로는 미래를 알면서도 살아가는 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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